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단 편집) ====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 논쟁 ==== 상기한 임시정부의 위치 논쟁은 사실 어떤 식으로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배경에 두고 있었다. 그 주요한 내용이 신한혁명당과 이승만 등으로 대표되는 외교독립론(조선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제3자에게 납득시키자)이고, 다른 한 축은 무장독립론(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자)일이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외교론이 득세하면서 상하이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외교독립론은 힘을 잃었다. 서양열강에 대한 지원요구는 조선의 독립이 자신들에게 가져오는 이득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반제국주의 투쟁 지원을 선언한 레닌에 대해서도 앞서 언급한 공산주의에 관한 시각차이로 쉽사리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오히려 신한혁명당의 김규식 등이 국제공산당 사건으로 쫓겨난다. 마지막으로 미국에 대해서는, [[박용만(1881)|박용만]]을 몰아낸 이승만이 역시 앞서 언급한 위임 통치 청원을 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외교독립론을 포기하고 무쟁투쟁론으로 전환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데, 이건 이것대로 문제였다. 임시정부에는 직접적으로 운용하는 병력이 없었다. 만주와 연해주에 있던 무장세력은 사실상 임시정부와 따로 놀았으며 그 마저도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규모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축소된다. 명목상으로는 남만주의 서로군정서와 북간도의 대한군정서, 통칭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 휘하에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명목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서로군정서는 [[신민회]]가 삼원보 지역에서 시작해서 자생했던 군사조직이다. 신민회가 삼원보에 거점을 만들면서 경학사와 부민단이라는 자치단체를 만들었는데, 이중 부민단에서 이어진게 한족회고, 한족회의 임시군정부가 서로군정서다. 이 신민회가 이름만 바꾼 것이 서로 군정서다. 북로군정서는 [[대종교]] 계통에서 만든 대한군정부가 역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이 두 조직은 모두 별도의 무관학교와 자치단체, 내부 자금원 등을 갖춘 독립적 조직으로 임시정부와의 연결고리는 몇몇 주도적 인물들이 양쪽에 모두 이름을 걸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기반으로 외교론으로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할 것인가의 대결에서 외교론이 승리해서 상하이 조계지에 자리잡은 시점에서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가 만주와 간도에 있는 무장단체를 직접 지휘할 수 없게 되었고 임시정부는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본토와의 직접적 연결고리를 빠르게 상실한다. 단적으로 임시정부는 명목상으로 군무부 산하의 '[[광복군사령부]]'라는 조직을 만들기는 하였으나 간도참변으로 빠르게 와해되면서 활약이 사실상 전무하다. 이 잔존세력이 모여서 구성했다는 것이 광복군 총영인데, 이들은 자기들끼리도 통합이 완전하지 않은데다 사실상 독자세력화 되었다. 한반도와의 연결고리로 만들어놓은 연통제와 교통국은 1921년에 발각되어서 붕괴해 버렸기 때문에, 통신도 안 되는 상황에서 지휘는 불가능했다. 결국 이름만 임시정부 산하일뿐 모든 무장세력은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참고로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병력이 그나마 움직인 것은 자유시 참변 이후의 일이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 잔존세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가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개편되었는데, 이게 1923년의 일이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이다. 그런데 이나마도 임시정부가 주도해서 창설한 것은 아니고, 당시 만주지역에 있던 무장투쟁단체중 일부가 일부러 상하이까지 가서 임시정부와 접촉해서[* 이유가 눈물나는데, 당시 남만주에 있던 잔존 세력들이 대한통의부를 결성하는데, 달랑 7개 중대로 구성된 이 단체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으로 분열한다. 이후 강경 복벽주의 세력은 의군부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어서 나갔지만 그 상황에서도 대립이 이어지자 그나마 중립적이었던 중대 사람들이 외부세력이 임시정부를 찾아간 것이다. 이는 통의부의 구성세력에 광복군 총영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결고리가 있어서 였다.] 임시정부 직할이라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결국 참의부는 1928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인 3부통합운동으로 탄생한 혁신의회, 그리고 일부는 국민부에 통합되는 형태로 해체되는데 국민부([[조선혁명군]])건 혁신의회([[한국독립군]])건 임시정부 직할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이 해소에 있어서 딱히 임시정부의 통제를 받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1940년대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때까지 임시정부가 움직일 수 있었던 병력은 없었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 본대를 이끌고 합류하기는 하는데,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독자적 활동을 하다가 만주에서 인근 세력과 합쳐져서 이름을 바꾼다. 그게 바로 위에 언급된 조선의용군이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부는 분열되었고, 외교독립도 붕괴했으며, 무장투쟁론도 어렵다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1923년 [[신채호]]의 주도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여기에서 임시정부의 창조론(기존 정부를 해체하고 다시 정부를 수립, 무장 투쟁할 것을 주장)을 내세우는 이르쿠츠크파와 개조론(기존 정부를 유지하고 부분적으로 구조를 바꾸자는 주장)을 내세우는 상하이파(당시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의 상해파와 여운형의 이르쿠츠크파가 있었다)로 분열되었다. 진행과정에서 개조파의 상당수를 차지 하였던 서로 군정서와 한족회에서 대표소환을 하면서 대표회의에 참석한 개조파 의원의 숫자가 대폭 줄었고, 주류가 된 창조파가 주도한 끝에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정 해산과 새로운 정부 수립, 국민대표회의의 폐회를 선언하자 개조파 위원들이 집단 반발하였다. 이후 창조파들은 위치를 옮겨가면서 회의를 계속했으나, 실효성 있는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고, 결국 개조파와 창조파 모두가 임정을 떠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애초부터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반대했던 현상유지파 내무총장 김구는 국민대표회의 성과가 미진하다는 이유로 내무령 제1호 발령을 통해 국민대표회의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영향력은 없었다. 해산명령 내려서 해산되었을 것이었으면, 개최도 안 되었을 것이었으니까. 국민대표회의의 개최와 해산은 임시정부가 본격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민대표회의의 배경이기도 했던 이승만은 1925년에야 탄핵되었고, 박은식이 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정부의 정치 제도를 국무령제로 개편하였으나 박은식은 취임 3개월만에 병사한다. 이후 [[이동녕]], [[홍진]] 등이 국무령으로 몇 개월 간을 집권하다 1927년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여 집단지도체제의 주요 지도자로서 임시정부를 이끌게 되지만 이미 침체기에 들어간 것은 불문가지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구가 뭐라도 해보려고 조직한 것이 바로 [[한인애국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